•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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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태어나 출생신고를 하는 것은 오늘날 당연한 상식이자, 불이행시 과태료가 부과되는 의무다. 출생등록이 되지 않아 기본권은 커녕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인신매매 등 각종 범죄에까지 이용되는 아이들의 사례는 개발도상국에서나 일어날법한 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1960년대, 우리나라에도 12만명에 달하는 무적자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병역기피자와 범법자도 있었지만 6·25전쟁 이후 부모형제를 잃고 굶주리고 방황하는 수많은 아이들과 갖가지 사연으로 인해 호적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8만여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성원 전() 희망원 원장(이하 이 원장)은 당시 누구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무호적자 호적 만들어주기 운동을 펼치며 의미 있는 성과까지 이끌어낸 인물(人物)이다.

 

1937년 조치원에서 태어난 이 원장은 역무원으로 일하던 1960년대, 조치원역 대합실에 청소년 상담소를 만들고 불우한 아이들과 지역 내 각 기관, 유지 등과 결연을 맺도록 하고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의 일을 하며 자립하도록 도왔다. 나아가 1964년에는 희망원이라는 이름으로 보육원을 설립하고 농사짓기, 토끼·돼지 키우기, 수공품 만들기 등 각종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국가보조금 없이 사재를 털어 희망원을 운영한 것은 걸인청을 만들었던 토정 이지함 선생의 16대 손이자, 6·25전쟁 철도영웅으로 불리는 이영복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가풍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방황하는 아이들과 함께하며 호적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를 하지 못하고 아이를 낳아도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무적자들의 처참한 삶을 직접 본 이 원장은 세계 인권의 날이었던 19651210, ‘무호적자 호적 만들어주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통령, 대법원장, 국무총리, 내무무장관, 보건사회부장관, 서울시장과 각시도지사를 비롯해 변호사협회장, 중앙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 등에 호소문을 보내고 직접 전국을 다니며 거리 캠페인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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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원 전 원장의 호적만들어주기 운동 이후, 196810월말부터는 전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고 12만명의 사람들이 호적을 갖게 되고 학교에 입학하며, 군에 입대하고 결혼 후 호적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당당하게 올릴 수 있게 됐다. 한 개인이 범국민적 인권수호운동을 주도하고, 각종 언론이 이를 보도하고 집중 조명하면서 법무부가 무호적자를 구제하는 방안을 발표하게 한 유례가 없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희망원을 거쳐간 500여명의 아이들이 당당하게 사회에 진출하고 이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파한 이 원장은 꾸준히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각급학교를 찾아 참다워, 정다워, 아름다워라는 의미를 담은 다워야 운동을 전파하고 있다. 부모와 학생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협력하고 공존하며 함께 승리하는 신바람나는 삶을 살아가자는 내용의 특강을 통해 여전히 아이들의 곁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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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누구보다 먼저 인권운동에 앞장서고 청소년 선도에 오랜기간 몸담아온 이 원장은 그 공로를 인정 받아 제4‘2020 창조혁신 한국인 대상에서 인권운동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 원장은 그 시절 힘들고 아픈 일도 많았지만, 희망원에서 성장한 우리 아이들이 희망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기에 무엇보다 뿌듯하고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앞으로의 여생도 청소년 선도와 다워야 운동강의를 하며 밝고 명랑한 사회의 초석을 다지는데 쓰고자 한다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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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호적자 8만명에 이름을! 가족이 없는 아이들에게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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